☞ 80년대 중반,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면서 한 때 유니섹스(UNISEX) 패션풍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의상부터 헤어스타일까지 남녀를 구분할 수 없다는 의미다.☜
늘 개량 한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만날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하는 그는 가끔 ‘머털도사’의 ‘머털’이를 연상하게 한다. 털털할 것 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의외로 까탈스러운 식성을 갖고 있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고 길거리 음식은 손도 대지 않는다. 놀랄 때는 “어머?” 하며 여성스러운 면을 보이지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몸에 페인트를 묻혀가며 현장을 지휘할 때는 남자 중에 상남자 같다. 그는 유니섹스형 리더, 사단법인 ‘더불어함께’ 정경 대표다.
만날 때 마다 여유 있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차 한 잔 하자고 시간 뺏기가 미안한 그를 지난 1월9일(토)에 인터뷰로 낚았다. 항상 일터 내에서만 보던 그를 다른 장소에 옮겨 놓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오후 3시 30분, 겨울 햇살이 숨 가쁘게 넘어가려는 시간, 정왕역 앞에 햇살이 가득 담긴 한 카페에서 그를 마주했다. 머그잔 위로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며 어색한 인터뷰가 시작됐다.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갑작스런 질문에 머뭇거리다 내린 답은 “여린 사람?”이었다. 이유를 묻자, 지역 아이들을 돌보며 안쓰러운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많이 울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이유를 대는 건 그 만큼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쉽게 하고 덜렁대는 면도 있지만, 대부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신중한 사람이라고도 표현했다. “어떤 사람은 추진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하지만 추진력은 누구나 다 있어요. 일을 실천해 가는 과정에서 약속을 지키는 사람과 덜 지키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약속을 꼭 지켜야 하는 사람이에요.”
부정적 이미지를 묻고 답하는 건 서로가 불편하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라고 묻자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아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쉽게 풀이를 했다. “일을 할 때 노(no)를 하지 않아요. 아마 추진력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게 그 이유인 것 같기도 해요.”누구나 왜곡된 이미지를 마주하면 불편하고 속이 상한다. 정경 대표는 이런 왜곡된 자신의 이미지를 벗으려 애쓰지 않는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진다고 보거든요”
가끔 커피를 마시려고 숙이는 그의 머리 위로 둥지를 튼 흰머리가 보였다. 이제 오십 문턱까지 다다른 그의 나이테에 어떤 이야기가 새겨져 있을까.
“육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서울 깍쟁이”
보릿고개를 겨우 넘긴 60년 대 후반, 그는 서울 인왕산 근교에서 3명의 언니와 막내 여동생 그리고 오빠를 둔 다섯째로 태어났다. 언니들과 나이 터울이 큰 탓에 넷째인 오빠와 딱지 치고 구슬 치며 놀던 기억을 더 많이 떠 올렸다. 대개는 여성 형제가 많으면 여성스럽게 자라지 않느냐는 물음에 ‘여성...스럽죠’ 라며 웃음소리를 털어냈다. ‘내가 어디가 여성스럽지 않냐’라는 되물음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자이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유도나 투포환을 했을 것 같은 넉넉한 체격의 정경 대표는 의외로 빠르고 정확한 타격을 요하는 태권도 운동 출신이다. 한 때는 날렵한 태권도 유망주였다. 지금의 몸은 2009년도에 첫째 언니를 위해 신장을 떼어 준 이후 생겨난 부작용이다. 그의 청소년 나이테는 운동 이야기로 새겨져 있었다.
“태권도 유망주에서 건설 현장 20대 처자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형제까지 많았던 정경이 중학교를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운동부에 선발되면 학비를 지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중학교 장거리 육상 선수를 지원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주변에는 육상 운동을 계속할 만한 고등학교가 많지 않았다. ‘육상선수로 갈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체고를 가자’라고 마음 먹은 곳이 인천체육고등학교였다. 함께 입학한 중학교 동기들은 싸이클, 사격, 조정 등 주특기별로 부가 나뉘어졌고, 당시 월등한 체력과 감각이 있던 정경 또한 태권도부에 무난히 합격했다. 태권도 선수로 줄곧 성장할 것만 같았던 그에게 체고 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발생한 건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선·후배 서열이 엄격한 체고에서 선배들로부터 당하는 불합리한 지시와 폭행은 순응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루는 이런 선배들의 폭행에 대항해 동기들과 함께 학교를 무단 이탈했다. 강남 한 모텔에서 열흘 동안을 지내고 돌아오자, 코치는 주동자로 정경을 지목했고, 변명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침묵으로 일관하자 곧바로 문제아로 낙인 찍혀 버렸다. 각종 대회에서 메달권 입상 뿐만 아니라 당시 현 국가대표도 이겼을 정도로 태권도에 소질을 보였던 그였지만, 이미 코치로부터 찍혀 있는 이미지를 극복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다 성장했지만 태권도를 하기에 유리하지 않은 신체구조와 코치까지 외면하는 체고 생활은 대학을 일찍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재수 후 지방대 사회체육과를 선택해 대학을 다녔지만, 졸업 후에 그의 진로는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건설 분야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형부가 운영하고 있던 일산의 작은 인테리어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20대 초반의 아가씨에게 건설 현장의 일은 의외로 자신과 잘 맞았다. 31살 때부터는 자신의 독립된 인테리어 회사를 갖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시흥시는 잠시 한 달만 있다 갈 곳”
정경 대표와 시흥시의 인연은 20대 후반부터다.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정왕본동 이주민단지였다. 연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직장 생활을 하거나 정착하기 위한 이유도 아니었다. 아버지 환갑 선물로 형제들이 건물을 하나 지어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건물을 짓게 된 이유는 정왕동이 대부도와 연결되면서 부동산 투자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는 셋째 형부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이 완공되고도 정경 대표를 비롯해서 모든 가족들은 다른 곳에서 살았다. 몇 년이 지나자 건물에 입주한 세입자들의 잦은 사고가 발생했다. 첫째 언니가 건물을 관리하기 위해 시아버지까지 모시고 정왕본동 건물에 입주했다. IMF 이후 정왕본동 지역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이 몰리는 동네가 되었다. 언니는 이곳에서 그들의 자녀를 돌보기 위한 선교원을 시작했다.
일손이 딸리자 언니는 일산에서 인테리어 일을 하고 있던 정경 대표에게 손을 내 밀었다. “경아, 한 달만 봐 줘” 98년 9월 3일, 정경 대표는 한 달짜리 시흥시 삶을 시작했고, 한 달 후 일산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고 있던 체고 후배 백재은(더함사무국장)에게 똑 같은 이유로 손을 내 밀었다. “재은아, 한 달만 봐 줘” 3년 만에 언니는 신학 공부와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원을 내려 놨다. 그때부터 정경 대표의 시흥살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더불어함께’는 정왕본동 아이들과 함께 자란 기관”
선교원 아이들이 자라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선교원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이 되었다.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드는 생각은 ‘복지차원에서 지역아동센터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그 때 정경 대표는 사회복지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2008년도에는 지역아동센터를 개인 복지시설로 인가를 내서 운영했다. 하지만 개인시설은 대외적인 사업 활동에 한계가 많았다. 2011년부터 보다 큰 틀을 구상했고, 2013년에 사단법인 ‘더불어함께’를 설립했다. 현재 ‘더불어함께’에서는 네트워크 교육사업, 마을학교, 노인방문요양 사업 등 지역 교육 및 복지 사업을 펼쳐 나가고 있다. 2014년도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다섯 사람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두레반 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외로웠죠. 많이….”
정경 대표는 18년째 시흥시의 가장 낮은 곳, 정왕본동에서 ‘욕심 많은 사람’으로 살아오고 있다. “사업을 시작할 땐 신중하지만, 일이 시작되면 결과를 미리 판단하지 않아요. 노력하면 다 된다고 믿거든요.”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때로는 무모할 것 같은 긍정적인 마인드가 없었다면 정경 대표는 이곳 정왕본동에서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시흥시를 떠났을 것이다. 그에게 최근 2년은 감사한 시기라고 말한다. “조급함이 덜 해진 것 같아요. 이제는 ‘아니면 어때’라는 여유가 좀 생겼어요.” 그 시점은 지역에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부터라고 전했다. ‘그 전에도 잘 했지 않았나’라고 되묻자, “외로웠죠. 많이…”
10년 후 자신의 모습은 마을 강사라고 한다. 현대의 마을이란 행정적, 물리적 경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웃들이 축제나 교육 프로그램 또는 문화 소비 활동, 동아리 모임 등을 통해서 일상의 즐거움을 찾고 삶을 나누는 정서적 용어에 무게감이 더 크다. 정경 대표는 그런 마을을 만들기 위해 활동가 겸 강사이고 싶어 한다.
“목석같은 그에게도 달달한 러브스토리가 있었을까”
결혼관에 대해 물었다. “내게 있어 결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었어요. 결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더 중요했어요.” 가슴 저릴만한 사랑을 느꼈던 사람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없어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꽃같은 20대 정경에게도 그를 좋아하고 사랑해 준 남자들이 있었다. 첫 키스에 대한 고루한 질문도 정경이란 사람에게는 침 삼키게 할 만큼 궁금한 질문이었다. 연애할 때 가장 강했던 스킨십이 뭐였냐고 물었다. “손잡은 거요”. 그가 왜 말 끝을 흐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상형을 물었다. 배우 박상원 씨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이상형이 나타나면 결혼하고 싶냐고 묻자, 단번에 “당연하죠”라고 답한다.
국민대 공간디자인학과 김개천 교수는 모 방송에서 현대 미인의 기준은 없어졌고 자신만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 매혹적인 사람이라고 미에 대해 새롭게 정의했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그 어떤 것도 연연해 하지 않고,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일을 하는 사람, 정경 그는 매혹적인 사람이다. 이제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건 더 이상 박상원이 아니다. 그와 함께 마을을 일구고 있는 사람들이다.
취재: 김용봉, 사진: 백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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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터뷰는 (사)더불어함께와 시흥시지역혁신연구회가 진행한 지역자원조사의 일원이며, '유(You)'에 함께 개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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