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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시민저널

카레이스키 이목사의 꿈

“한국에 고려인 마을 세우는 것”



전주 이씨인 이아르카지 목사(60)를 7일 오후 봉우재 고개 밑 농장에서 만났다. 이 목사는 며칠 후 셋째 아들 결혼을 앞두고 있다. 자식 결혼식도 흥겨운 일이지만 동생 결혼식을 보기 위해 큰 아들이 손자와 함께 러시아에서 어젯밤 도착했다. 큰 아들 왈레리(37)는 한국이 처음이다. 큰 아들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 1997년 한국에 와서 불법체류자가 되어 고향에 가보지 못하다가 재작년 가을에야 체류 비자를 받고 15년 만에 우즈베키스탄 집에 갈 수 있었다. 


부인과 다른 아들들은 그 사이 한국을 방문해서 만날 수 있었으나 큰 아들은 15년 동안 보지 못했다. 그 때의 감회는 기쁨보다는 잘 자라준 아이에 대한 고마움이 컸다. 왈레리는 지금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에서 농장도 운영하고 기독교 목사로 목회도 하고 있다. 이목사의 할아버지는 북간도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목사 말투에는 함경도 억양이 짙다. 아버지는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유명한 스탈린의 강제이주를 겪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마을이 김병화마을이니 이목사 집안의 역사는 이미 한국의 티브이 방송을 여러 번 탄 셈이다.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이주나 김병화마을에 대해서는 여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다루었다. 지금도 이 내용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강제이주는 조선인에게 가혹한 역사였고 김병화라는 고려인이 일구어 낸 신화는 그 이름 석 자를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에 널리 빛나게 하면서 고려인들의 자랑이 되었다.     


그 영광스러운 마을에서 한국에 온 이 목사는 운이 나빴다. 한국에 올 때는 목사가 아니라 전기 기술자였다. 이아르카지씨가 돈을 벌기위해 한국에 온 그 해는 하필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이었다. 한국 사람들도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던 그 시기였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 고통을 겪었다. 비타민이 부족해서 잇몸이 무너졌다.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이빨이 쑥쑥 뽑혀 나왔다. 이빨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빠졌다. 


그때 만난 우즈베키스탄 유학생들이 이대로 있다가는 얼어 죽는다며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교회로 이 씨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밥 두 그릇을 세 사람이 나누어 먹으며 힘든 시기를 넘겼다. 구 소련의 나라들 중 ‘스탄’으로 이름이 끝나는 곳은 이슬람국가들이다. 이 씨는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고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 당시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서울 신대방에서 2002년 처음으로 교회를 차렸다. 그 교회에 오기만 하면 누구든 추위를 피하고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했다. 그가 받았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신학교까지 개설한 이 목사는 2011년에 정왕동에 왔다. 현재 신학교에 학생은 이십 명 정도. 숙소도 갖추고 있다. 이 목사는 마유로의 봉우재고개 밑에 있는 농장에 틈틈이 나간다. 한국 토양과 기후에서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여름 장마에 농사를 완전히 망치면서 비닐하우스를 짓기 시작했다. 개 닭 토끼도 기른다. 신학생들도 와서 거든다. 그들에게는 이 농장이 농사를 배우고 실습하는 학교다. 이 목사는 언젠가 한국에 고려인 마을을 세울 꿈을 갖고 있다. 그 마을에서 고려인들에게 한국의 토양과 기후에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 목사는 지금 가르치는 이 신학생들이 앞으로 건설될 고려인 마을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 마을에 몰려 올 고려인들은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고 부품 조립 같은 일을 하면서 살 것이다. 유아원이나 학교도 필요하고 사람들의 신앙을 이끌 목회자도 필요하다.고려인들은 이역만리 중앙아시아에서 고난의 세월을 견뎌왔다. 수십 년 동안 낯선 인종과 문화 속에서 “늘 쫒기면서 살아왔다”고 말한다. 너희 고향으로 가라는 현지인들의 텃세는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소련이 붕괴되고 90년대 고려인들은 ‘할아버지의 땅’으로 벅찬 가슴들을 안고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그 조부모의 땅은 따뜻하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조상의 나라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한국에서 견디기가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고려인 노인들은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한다’며 한국을 떠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가 고려인 마을을 건설하면 20세기를 험난하게 해쳐온 카레이스키(고려인)들의 ‘귀향’이 그곳에서 실현될 것이다. 이 목사는 막내 아들의 결혼식에 정왕타임즈 독자들을 초대한다. 11일 낮 11시부터 결혼식을 하고 밤 늦게까지 춤추고 놀 예정이다.    


주영경 기자 igan@naver.com  


<정왕타임즈 5호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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